<박영희교수 인문학 칼럼> 제829호: 기다림의 美學

박영희 승인 2021.12.04 10:48 의견 0

붙잡을 수 없는 계절 변화의 속도(速度)는 느린 인간의 시간을 앞서고 추월(追越)하기에 항상 과지(過知)할 뿐이다. 사흘이 지나면 24절기(節氣) 가운데 스물한 번째인 大雪이다. 함박눈이 소복이 내리는 거북이처럼 느린 일상(日常) 무척 그립다. 어린아이처럼 기다렸던 눈(雪)보다 먼저 칼바람의 한기(寒氣)가 들이 닥쳤다. 누군가 필자(筆者)를 강추위 속으로 밀어 넣고 경험해보라는 느낌이다. 사계(四季)의 순환(循環)은 시절인연(時節因緣)의 영역(領域)이지만, 눈 내리는 풍경이 아니라면 아름다운 늦가을의 고고한 정취(情趣)를 쫓아낸 겨울(冬)의 삭막(索莫)함을 학수고대(鶴首苦待)하는 사람은 드물다. 계절의 오고감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이지만 그리움이나 소망(所望)은 개척(開拓)의 領域이다. 단순하게 말한다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한바탕 겨울은 봄이 온다는 희망으로 연명(延命)을 하네.“ (-중략(中略)-) “인고(忍苦)의 계절은/헛되지 않으리라는/뒤설켜진 거미줄의/고독 속에는/빛나는 면류관이 기다린다.“ ​시인 홍수희는 <기다림의 시(詩)>를 통해 기다림의 美學을 노래하며 겨울은 '봄이 온다'는 희망을 품고 있으므로 스스로를 단련(鍛鍊)하고, 그 힘으로 추운 겨울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기다림이 없다면 성숙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을 즈음에라야 춘풍(春風)이 불어온다. 먼 산에서 범(虎)이 내려오기 전에 기다림의 최대치까지 가보면 '나'라는 사람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때가 바로 나를 발견하는 별의 순간이다. 황동규 시인은 <즐거운 편지>에서 '기다림'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기다림이라는 것이 일방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너에게로 가는 능동적인 행위가 된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소망한다. 내 자세와 삶에 대한 태도가 기다림을 통해 바뀌었기를, 여전히 기다려야 한다면 더 기다리며 인내할 수 있기를. 너그러움, 여유, 유유자적, 은근함, 결국 기다림의 영성(靈性)과 '기다림의 미학(美學)'이 결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잠시 멈추면 보인다‘는 조언(助言)처럼 하던 일을 잠깐 멈추고 나를 사랑하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正體)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사랑을 증명하는 것은 그 사람의 부재(不在)다. 기다림의 유익(有益)은 그 시간을 통해 불순물들이 빠져나가고 순전한 것만 남는다는 거다. 어쩌면 나라는 존재마저도 다 사라져 버린 상태가 되었을 때, 제대로 기다렸다고 할 수 있다. 정호승 시인은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라고 했다. 필자(筆者)의 생각으로는 외로움을 '기다림'으로 바꿔도 무방하다. '기다림의 美學'은 우리 삶을 윤택(潤澤)하게, 또 긴장하게도 가르치는 일타 강사다. 느긋한 견딤(耐)과 기다림의 美學이 완성되었던 특이한 경험이나 별의 순간은 희미하기에 허름한 방한복(防寒服)을 입고 수취인(受取人) 불명(不明)의 막막한 편지를 쓰며 남쪽나라의 봄을 기다린다.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 봄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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