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물들었던 만산홍엽(滿山紅葉)은 만추(晩秋)를 장식했지만 군사작전처럼 기습(奇襲)한 영하(零下)의 날씨에 황망(慌忙)히 움츠러들었다. 갑작스런 추위에 부르르 떨고 있는 나뭇잎, 차마 바라볼 수 없기에 안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작은 벽난로가 있었던 그 겨울의 찻집을 떠올리며 딴청을 부린다. 기후변화에 따라 추계(秋界)의 길이가 짧고, 애매모호(曖昧模糊)한 가을(秋), 겨울(冬)의 경계가 불만족스럽기 때문이다. 정숙한 늦가을 정취(情趣)는 순간이었고, 초대하지도 않은 冬장군이 압수수색하는 수사관처럼 불쑥 찾아 왔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따뜻했던 봄날에 깊숙이 처박아 두었던 난로(煖爐)를 꺼내며 차디찬 계절의 추심(秋心)에 온기(溫氣)를 불어 넣지만, 나를 어찌할텐가 방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선풍기가 눈엣가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코로나 시대의 환기(換氣), 그 방역(防疫)의 도구로 아주 요긴하게 활용되었고, 한여름의 폭염(暴炎)과 습도(濕度)를 견디게 해줬던 고마운 존재였다. 날개를 일일이 닦고 커버에 보관할 생각을 하니 그만 귀찮아진 것이다. 오래된 선풍기라서 회전 소음(騷音)이 거슬리니 이참에 버리고 다시 살까, 갈등이 생길 즈음에 ‘쓸모없음의 쓸모’가 문득 생각났다. 잘 익은 고사성어(故事成語) ‘하로동선(夏爐冬扇)‘이다.

?철에 맞지 않거나 격에 맞지 않는 물건을 비유(比喩)하는 말로 쓰이는 ‘夏爐冬扇’은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봉우(逢遇)편에 나오는데, ‘여름에 화로를 올리고 겨울에 부채를 바친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작무익지능(作無益之能), 이로울 것 없는 재능을 바치고, 납무보지설(納無補之說), 보탬이 되지 않는 의견을 내며, 이하진로(以夏進爐), 여름에 화로를 올리고, 이동주선(以冬奏扇), 겨울에 부채를 바치며, 위소불욕득지사(爲所不欲得之事), 얻고자 하지 않는 일을 하고 헌소불욕문지어(獻所不欲聞之語), 듣고자 하지 않는 말을 올리면서도 기부득화, 행의(其不得禍, 幸矣). 화를 당하지 않는다면 큰 행운이다. 사전적(辭典的) 뜻으로는 여름의 화로와 겨울의 부채. 제철에 맞지 않거나 쓸모없는 물건을 비교하거나, 아무런 쓸모가 없는 말이나 재주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당장 쓸모없지만 나중엔 필요한 존재. 때로는 철에 안 맞는 물건도 유용하게 쓸 수 있으니, ‘무용지물(無用之物)은 없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중국 전국시대 맹상군의 계명구도(鷄鳴狗盜) 고사(故事)는 누엣가시 선풍기의 존재가치를 새롭게 한다. 맹상군의 식객(食客) 중에는 닭 울음소리 잘 내는 사람과 개 짖는 흉내를 잘 내는 좀도둑이 있었다. 그들은 다른 식객들로부터 밥만 축내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비난과 질타(叱咤)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맹상군이 진(秦)나라에 잡혀갔을 때 한 사람은 개 흉내를 내며 귀한 가죽옷을 훔쳐 탈출의 기회를 마련하고, 또 한 사람은 닭 울음소리로 성문(城門)을 열게(開) 하여 무사히 도망칠 수 있게 한 일등공신들이었다. ‘쓸모없음의 쓸모’, 즉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는 장자(莊子)의 말처럼, 언뜻 보아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큰 쓰임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鷄鳴狗盜’의 두 사람은 보잘것 없음의 가치를 통쾌하게 증명하였다. 세상은 당장 필요하고 쓸모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훗날을 위해 급하지 않은 일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시사(示唆)의 夏爐冬扇은 ‘플랜A’와 완전히 다른 ‘플랜B’를 의미하기도 한다. 위드 코로나 시대를 건너가야 하는 지금 우리는 ‘夏爐冬扇(기대치)’에서 플랜B(실체)로 가는 길목에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든 시절인연(時節因緣)에 따라 그 때와 장소에 의해 필요도 하고 불필요할 뿐이다. 쓸모있음은 눈에 띄지만 쓸모없음은 잘 보이지 않는다. 닥칠 추위보다는 따뜻한 봄날을 기대하지만 앞날이 불확실하고 세상이 무척 어수선하다. 누가 알겠는가! 아무 쓸모가 없었던 것들이 새로운 가치로 등장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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